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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통역안내사 2020-2023 기출 최종 오답노트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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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Violet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회   작성일Date 24-09-06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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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塋-仁規-壻 부산고구려$ 廉世忠-悌臣-壻 洪徵-尙溥-智-敬孫(文科)-潤德(文科)-壻 李遠 -光軫(文科)-壻 朴惺-壻 黃中允(文科)-壻 鄭基德-壻 李誠哲(判官)-壻 金鏞 -尙質-綽-之翼-是瑚-翰儒-昶敎-濟渤-芝同(=제 할머니)​::청송심씨대종회 (csshim.or.kr)여흥민씨대종회 (minssi.net)청주한씨중앙종친회 (cheongjuhan.net)한양조씨대종회-인터넷족보 (hanyangjo.kr)鵝洲申氏(아주신씨) 大同譜 序(아주신씨대동보서)​강릉김씨대종회 (gnkim.kr)경주·순창설씨대종회 (seol.or.kr)​----------------------------------------------------------------------------------------------------------------------------------​고려사 열전 번역문고려사열전 조인규[ 趙仁規 ]​고려사열전 조인규[ 趙仁規 ] 조인규(趙仁規)1)는 자가 거진(去塵)이며 평양부(平壤府) 상원군(祥原郡 : 지금의 평양특별시 상원군) 사람이다. 그 모친이 해가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으며 장성하면서 공부를 시작해 글 뜻을 대충 알게 되었다. 당시 나라에서는 자제들 가운데 영민한 자를 뽑아서 몽고어를 익히게 하였는데,2)조인규도 뽑혀 들어갔다. 동료들 중에서 그 다시 빼어난 성적을 올리지 못했으나 3년 두문불출하며 밤낮으로 노력한 결과 드디어 이름이 알려져 제교(諸校)로 보임되었고 거듭 승진해 장군이 되었다. 충렬왕 때 조인규가 휘하의 군졸인 개삼(介三)을 시켜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특별시) 백성 여덟 명을 설득해 달호(獺戶)3)로 삼았다. 그러자 조세(租稅)를 회피하려는 백성들이 다수 그에게 빌붙었으며, 해마다 경성궁(敬成宮)4)에 바치는 수달 가죽의 반은 조인규의 집으로 들어갔다. 남경사록(南京司錄) 이익방(李益邦)5)이 개삼을 수감하자 조인규가 공주에게, 남경의 관리가 궁중에서 보낸 교서를 찢어버렸다고 무고했다. 공주가 노해 이익방과 부사(副使) 최자수(崔資壽)를 체포하게 한 후 장군 임비(林庇)6)를 보내 그들을 국문하였다. 임비가 실상을 알아내 공주에게 보고하니, 달호가 된 백성들은 원래 신분으로 되돌리고 두 사람을 유배보냈다가 곧 석방하였다. 어떤 재상이 응방(鷹坊)의 폐해7)에 대해 간언하자 왕이 노해 황제에게 신임을 받고 있던 회회(回回 : 아라비아)사람을 데려다가 응방을 나누어 관장하게 하고 재상들이 다시는 그에 대해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하려 했는데, 조인규가 극력 간쟁하여 중지시켰다. 이어 그를 우승지(右承旨)로 임명한 후 왕이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렸다. “저의 신하 조인규는 몽고어와 한어(漢語)에 밝아 조정의 조칙을 틀리는 곳 없이 번역해 내었습니다. 제가 과거 천자의 조정에 입시하였을 때 시종 저를 호종했으며, 아침저녁으로 각별히 힘써 공주를 섬겼습니다. 바라옵건대 그에게 패면(牌面)을 하사하시고 왕경(王京) 톡토하순[脫脫禾孫]8)겸 추고관두목(推考官頭目)으로 임명해 주십시오.” 이에 따라 원나라에서는 그를 선무장군(宣武將軍) 왕경단사관(王京斷事官) 톡토하순[脫脫禾孫]으로 임명하고 금패(金牌)를 하사하였다. 왕도 교서를 내렸다. “조인규는 일본 정벌 때 우리가 처한 형편을 천자께 잘 보고했다. 천자께서 과인을 중서 좌승상(中書左丞相)으로 임명하고 또한 여러 신하들에게 도원수(都元帥)·만호(萬戶)·천호(千戶)의 금은패(金銀牌)를 내려준 것은 모두 그의 공이다. 이에 특별히 그 공을 기려 전민(田民)을 내려주고 자손들은 관등을 넘어 관직에 등용하노라.” 한번은 왕이 남문(南門)에 행차했는데 마침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술에 취해 말을 탄 채로 그 앞을 가로 질러 갔다. 조인규가 평소 김방경과 권세가 서로 비슷한지라 이 때를 틈타 그를 참소하니 왕이 김방경을 바로 순마소(巡馬所)9)에 가두었다. 이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냈다. 당시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김온(金溫)10)의 처가 밤에 여동생의 집 재물을 훔치다가 잡혔는데 그 여동생의 남편이 조인규와 인척간이었다. 조인규가 김온의 아내를 결박하고 곤장을 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처사를 비난하였다. 왕이 조인규를 중찬으로 임명하려 하자 그가, “주상의 은혜가 지중하지만, 홍자번이 덕망으로 총재(冢宰)가 된지 이미 오래된 터에 제가 갑자기 그보다 상관이 된다면 사람들의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하며 사양했으므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곧 중찬으로 승진했고 곧이어 좌중찬(左中贊)이 되었다. 재추들이 당시 정치상의 폐해를 세 조목11)으로 나누어 간언하자 왕이 노했다. 조인규는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한 나머지 몰래 왕에게 “앞서 올린 세 가지 일은 제가 아는 것이 아니오니 그들을 국문하소서.”라고 건의했다. 왕이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이우(李紆)를 순마소(巡馬所)에 가두고 만호(萬戶) 고종수(高宗秀)를 시켜 맨 처음 간언하고자 주장한 자가 누군지 신문하도록 하였다. 고종수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다 못한 이우가 거짓으로 이혼(李混)의 이름을 댔고 이혼은 그에 따라 파직당했다. 충렬왕 24년(1298)에 조인규는 사도(司徒)·시중(侍中)·참지광정원사(叅知光政院事)로 올랐다. 과거 조인규의 딸이 충선왕비(忠宣王妃)가 되었을 때 어떤 자가 궁궐 문에다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시켜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 총애하도록 저주했다.”는 익명의 글을 붙였다. 공주가 조인규 부부를 하옥시키자 원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조인규를 국문했고 조인규의 처를 참혹하게 국문했더니 그 처가 거짓으로 자복하였다. 이에 원나라 사신이 조인규 및 사위 최충소(崔冲紹)·박선(朴瑄)12)을 체포해 돌아가고 가산을 몰수하여 사신의 객관으로 실어 갔다. 원나라에서 그들을 장형에 처한 후 조인규를 안서(安西)로, 최충소를 공창(鞏昌)으로 유배보냈다가 뒤에 조인규를 석방시켜 돌려보내니13)왕이 황제의 명에 따라 그를 바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로 임명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조인규를 자의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평양군(平壤君)으로 삼고 부(府)를 설치해 관속(官屬)을 배치해 주었으며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의 칭호를 하사했다. 이 때 승선(承宣) 김지겸(金之兼)14)을 보내 충렬왕에게 건의했다. “조인규는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국가의 원로이니 조회 때 옥대를 띠고 일산을 쓴 채로 임금을 시종하도록 하며, 찬배(贊拜)15)때 이름을 부르지 말고, 칼을 찬 채로 전각에 올라갈 수 있도록 허락하십시오. 그리고 대사가 있으면 첨의밀직(僉議密直) 한 명이 그의 집으로 가 자문을 받게 하되 만약 조인규 및 중찬(中贊) 최유엄(崔有渰)이 정한 사항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법을 위반한 것과 같이 논죄하소서.” 충렬왕이 그대로 좇았다. 충렬왕 34년(1308)에 나이 일흔둘에 죽으니 시호를 정숙(貞肅)이라고 하였다. 조인규는 풍모가 멋졌고 근엄했으며 전해오는 기록들을 꿰뚫고 있었다. 처음에 고려 사람들이 몽고어를 배우기는 했으나 회화를 능숙히 해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신들이 원나라 수도에 가면 그 조정에서는 반드시 대녕총관(大寧摠管) 강수형(康守衡)16)을 시켜 사신들을 데리고 가서 황제에게 아뢰게 하였다. 조인규가 일찍이 금으로 채색한 도자기를 바쳤더니 세조가 “금으로 채색한 것은 단단하게 하려고 함이냐?”고 물었다. 그렇게 색깔을 입힌 것일 뿐이라고 대답하자 채색한 금을 다시 쓸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조인규가 “도자기는 깨지기 쉽고 금도 따라서 훼손되어 버리니 어찌 다시 쓸 수 있겠습니까?”고 대꾸하자 세조는 그가 잘 대답했다고 하면서, 차후로는 금으로 채색하지 말 것이며 그런 도자기도 바치지도 말라고 명령했다. 또한 “고려 사람이 이처럼 몽고어를 잘 하는데 무엇하러 꼭 강수형을 시켜 통역하게 하겠는가?”라고 칭찬했다. 고려에 대해 묵은 원한을 품고 있던 원나라 사신 하나17)가 우리의 고유한 풍속을 고치려고18) 황제에게 건의해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조인규가 단신으로 원나라로 가 황제를 만나 사리를 명백히 설명한 결과 사태가 진정되었다. 서쪽과 북쪽 두 국경지대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도 조인규가 사신으로 가서 설득해 이루어 낸 공 덕분이었다. 왕은 원나라에 부탁할 일만 있으면 반드시 조인규를 보냈기 때문에 모두 서른 번이나 사신으로 가 힘껏 나라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미천한 신분에서 출세해 갑자기 중요한 관직을 차지한 사람으로, 겉모습이 장중하고 단아해 보였기 때문에 왕의 총애를 받아 늘 내전에까지 드나들었으며 전민(田民)을 긁어모아 큰 부를 쌓았다. 더욱이 국구(國舅)로서 당대에 최고 권력을 잡아 아들과 사위도 모두 장상(將相)의 반열에 올랐으니 아무도 그와 견줄 수 없었다. 병이 들어 아들과 사위가 의원을 불러다 진찰하게 하자 조인규는, “내가 졸병으로 시작하여 관직이 가장 높은 품계에 이르렀고 이미 나이 일흔을 넘겼다. 죽고 사는 것은 다 운명인데 무엇하어 의원을 부르느냐?”고 거절했다. 이때 다른 아들들은 모두 원나라에 있었고 조연(趙璉)만 병구완을 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너희 집안의 형제와 자매가 아홉 명이나 되니 성을 내거나 싸워서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라. 네 형제들이 도착하거든 이 말을 전해 길이 집안의 법도로 삼아라.”고 당부했다. 아들19)은 조서(趙瑞)·조연(趙璉)·조후(趙珝)·조위(趙瑋)다. 각주​1 조인규(1237∼1308) :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이 가문은 상원[祥原·土山 평양특별시 상원군]의 내성으로 배천 조씨(白川趙氏)에서 입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인규의 출신성분을 유이민의 후예인 양인농민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상원의 토성이족과 연결된 상당한 재지세력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것은 부친 조영(趙塋)이 금오위 별장이었던 점, 외조부 이문간(李文幹)이 상원 제일의 토성인 토산 이씨(土山李氏)로 내원승을 역임하였다는 점, 장인이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사재경(司宰卿)을 지낸 조온기[趙溫其·趙溫呂]였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조인규 가문은 새로운 대원(對元)관계에서 대두한 신흥세력으로 볼 수 있다. 즉 조인규는 원간섭기에 몽고어 통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충렬왕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대장군·중찬(中贊) 등을 역임하였으며, 원나라로부터도 선무장군(宣撫將軍)·왕경단사관(王京斷事官) 겸 톡토하순[脫脫禾孫]에 임명되어 그 정치적 지위를 더욱 높였다. 특히 충렬왕 18년(1292)에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국구(國舅)가 되어 그 기반을 다져 당대의 권력자로 부상하였다. ​그의 네 아들이 모두 삼사사(三司使)·찬성사 등 재상의 지위에 오르면서 그의 가문은 세족으로 성장하였다. 더욱이 이 가문은 대원관계를 통해 가문의 기반을 다진 만큼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둘째 딸은 원의 강절평장사(江浙平章事) 오마르[烏馬兒·吳抹]에게, 손녀는 안길왕(安吉王) 예르기니[也兒吉尼]에게 시집간 것에서 확인된다.​김용선 편, 「조인규(趙仁規) 묘지명」·「조연수(趙延壽)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민현구, 「조인규와 그 가문」 『진단학보』 42, 1976.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329~330쪽.김광철, 『고려후기세족층연구』, 동아대출판부, 1991, 83~84쪽.박용운, 『고려사회와 문벌귀족가문』, 경인문화사, 2003, 74·212쪽.​2 익히게 하였는데 : 몽고의 침입은 고려에게 몽고와 대화의 필요성을 가지게 하였다. 때문에 원종대 임시로 역어도감(譯語都監)을 두었다가 충렬왕 2년(1276)에 정식 관청으로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였다. 원간섭기 통역의 임무를 맡았던 자들은 대개 세족층보다는 한미한 가문이거나 미천한 자들이 주를 이루었다.황운룡, 「고려천류현관고」 『한국중세사회연구』, 동아대출판부, 1990, 40~41쪽.3 달호 : 원간섭기 원에게 바치는 수달피를 만드는 호를 말한다. 이들은 응방에 예속된 민들과 마찬가지로 요역에서 면제되었다.김순자, 「원간섭기 민의 동향」 『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민음사, 1994.4 경성궁 : 충렬왕의 왕비이자 원나라 공주인 제국대장공주의 궁 이름이다.5 이익방(?~?) : 세자부시학(世子府侍學)을 지내다가 충렬왕 2년(1276) 10월 지공거 허공(許珙)과 동지공거 설공검(薛公儉)이 주관한 과거에 김태현(金台鉉)·우천우(禹天佑) 등과 함께 급제한 이후 남경사록을 역임하다가 이듬해 조인규의 참소로 유배갔으나 곧 풀려난 문신관료이다.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33쪽.6 임비(?~?) : 충렬왕 때 장군·충청도지휘사(忠淸道指揮使)·대장군을 지낸 무신관료이다. 원종 때에는 정인경(鄭仁卿)·이지저(李之氐) 등과 함께 세자 왕심(王諶 : 충렬왕)의 원나라 입조를 시종하였고, 임연(林衍)이 국왕을 폐위시킨 기사정변(己巳政變) 때에도 고려로 귀국하던 세자를 파사부(婆娑府)에서 호종하여 원나라로 되돌아갔다. 충렬왕 8년(1282) 5월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장군 나유(羅裕)·지윤보(池允輔) 등과 함께 이등공신이 되었다. 같은 왕 때에는 조인규(趙仁規)의 지시로 불법을 행한 조인규의 휘하 군졸 개삼(介三)을 가둔 남경사록(南京司錄) 이익방(李益邦) 등을 신문하고 난 이후 그 사건을 잘 마무리 지었으며, 지윤보 등과 함께 심양(沈諹)을 신문하였다. 그러나 같은 왕 15년 3월에는 개주(盖州 : 지금의 중국 랴오양[遼寧]의 盖平縣)로 보내는 군량을 충당할 때 기한 내에 운반해 오지 못하여 직을 박탈당하였다.7 응방의 폐해 : 고려에 응방이 설치된 것은 충렬왕 즉위년(1274)으로 원나라에 대한 매 제공과 고려 왕들의 매사냥을 위한 사냥매 조달과 사육을 위해서였다. 고려에서 응방 설치를 주도한 인물은 원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던 윤수(尹秀)였는데 원나라 황제의 승인을 얻어 전라도 장흥 관할의 여러 섬과 충청도 홍주 관할 내의 곡양촌(曲楊村)에 응방을 설치하였다. 응방이 설치될 때 지방 수령 및 안찰사와 마찰이 있었는데 이는 응방에 소속된 호들의 요역이 면제되었으므로 지방행정을 운영해 나가는 수령으로서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응방의 조성비용이 과중하였기 때문이었다. 응방의 폐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사패(賜牌)를 빙자해서 전민을 탈점하였으며 응방에 소속된 호에 대하여 과중하게 수취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패단 때문에 재상들도 그것을 비판하였으나 왕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응방은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응방이 확대되자 자연히 여기에 대한 반발이 드세어졌다. 특히 해동청 사냥을 위해 옹진현(瓮津縣 : 지금의 황해남도 옹진군)에 응방을 설치하려고 하자 재상과 각 군현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하였다.이인제, 「고려후기 응방의 설치와 운영」 『한국사의 구조와 전개—하현강교수정년기념사학논총』, 혜안, 2000.8 톡토하순 : 원나라 때 역참에 두었던 관원으로, 주로 관회(關會)의 땅 즉 요충지에서 참역에서 수발되는 문서를 검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원사』 권101, 지49, 병4 참적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원나라제도에 참적이라는 것은 참역을 바꾸어 말한 이름이다. ··· 그 관청에는 역령과 제령이 있고 또 요충지에는 톡토하순을 두어 이로써 변힐(辨詰)을 맡아보았다(元站赤者 驛傳之譯名也—중략—其官有驛令 有提領 又置脫脫禾孫於關會之地 以司辨詰).”9 순마소 : 도적을 방지하기 위한 군사기구로 야별초 대신 충렬왕 때 만든 기구이다. 몽고의 제도를 본받은 것으로 충렬왕 말에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로 개칭되었다.10 김온(?~?) : 충숙왕대 심왕파로서 심왕 옹립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가 충숙왕 15년(1328) 조식(趙湜)·권하(權賀) 등과 더불어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에 하옥된 뒤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소환하여 갔다.11 세 조목 : 당시 재추들이 충렬왕에게 올린 3가지 폐단에 대한 건의 내용 모두는 알 수 없으나 그 중 한 가지는 확인된다. 충렬왕 측근들이 서북지역을 다니면서 역참(驛站)의 말[馬]을 함부로 이용하여 백성들과 역리(驛吏)들이 이를 몹시 괴로워하였는데, 재추들이 이것에 대한 시정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고려사』 권108, 열전21, 이혼전(李混傳) 참조.12 박선(?~1320) : 박경량(朴景亮)이라고도 하며, 충렬왕~충숙왕 때 군부판서(軍簿判書) 겸 권수밀직부사(權授密直副使)·지밀직사사·첨의평리를 역임하고 조인규(趙仁規)의 사위가 된 흥례군(興禮君) 박선(朴瑄)을 말한다. 한편 고종 때 교위(校尉)를 지내다가 유배된 무신관료 박선(朴瑄)과 다른 인물이다. 조인규의 사위 박선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24, 열전37, 박경량전(朴景亮傳) 참조.13 돌려보내니 : 조인규가 딸 충선왕비 조비사건으로 원나라에 끌려간 것은 충렬왕 24년(1298)이었다. 원으로 압송된 조인규는 원 조정에서 국문을 받은 후 유배되었다가 같은 왕 31년에 다시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김용선 편, 「조인규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14 김지겸(?~?) : 충렬왕 21년(1295)에 지후(祗侯)로서 원나라에 있는 세자에게 보내는 돈과 폐백을 운송하였다. 충선왕 3년(1311) 좌상시(左常侍)로서 원나라 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고 왔으며 밀직부사가 되었다. 충숙왕 원년(1314) 낙양군에 봉해지고 충근익대공신(忠勤翊戴功臣)이 되었으나 심왕(瀋王) 왕호(王暠)의 당여가 되어 충숙왕을 참소하였다가 같은 왕 15년에 영해부사로 좌천되었다. 충숙왕 후8년(1339) 조적(曹頔)의 난으로 충혜왕이 원나라로 소환되자 김자(金資)와 함께 원나라 황제를 배경으로 국정을 한손에 쥐었으며 충숙왕비인 경화공주(慶華公主)의 명으로 정동성의 장관인 권정동성(權征東省)에 임명되었다.15 찬배 : 의식 때 관직 이름을 부르고 절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16 강수형(?~1289) :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처음 이름은 강화상(姜和尙)이었다. 몽고의 포로가 되어 강수형이라 고치고 원나라 조정에서 고려와의 통역을 담당하였다. 원종을 호위하여 고려로 돌아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상장군·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찬성사 등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원년(1275)에 원과 고려의 통혼문제 및 고려의 관제개편과 관련된 원 세조의 조서를 가지고 고려에 왔으며 같은 왕 3년 4월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 이후 원나라의 대령총관이 되어 대고려 외교를 전담하였으며 같은 왕 13년 원나라에서 나얀대왕[乃顔大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경총관(東京摠管)이 되어 반란진압에 참여하였다.17 사신 하나 : 조인규 묘지명에 ‘원의 두목(頭目) 흑적(黑的)이 우리나라와 언짢은 감정을 쌓아 왔는데’라고 한 것으로 보아 흑적을 지칭한 것이다. 흑적은 충렬왕 원년(1275) 고려의 사신으로 다녀갔던 인물로 조부 아바[愛伯]는 칭기스칸을 따라 남정에 참여하다 전사하였고, 부친 예쉬르[也速兒]는 세조대에 만호가 되어 강남의 정벌에 큰 공을 세웠으며 일본정벌에 참여하는 등 고위직에 이르렀다. 예쉬르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흑적은 병부시랑으로 원 세조 3년(1266)에 고려를 거쳐 일본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풍랑으로 가지 못하였다. 같은 왕 5년 다시 고려를 거쳐 대마도까지 가서 일본인 2명을 잡아 왔다. 이후 흑적은 주로 대고려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이며 충렬왕 즉위년에 고려의 다루가치가 되었다.김용선 편, 「조인규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18 고치려고 : 고려와 원나라의 강화는 한법(漢法)적인 지배체제를 구상하고 있던 원 세조의 한지파(漢地派)와 무신정권의 몰락 후 개경환도를 주장하던 고려 내 정치세력 간의 타협의 결과였다. 고려와 원과의 강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고려의 토풍을 인정하는 한에서 고려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고려왕조와 그 제도와 풍속을 그대로 두면서 고려를 지배한다는 것을 주내용으로 한다. 흑적(黑的)이 토풍을 고치자고 한 것은 고려왕조를 인정하지 말자는 것을 의미하며 고려 다루가치였던 자신이 고려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이익주, 『고려·원관계의 구조와 고려후기정치체제』,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6, 37~55쪽.​19 아들 : 조인규는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사재경(司宰卿)을 지낸 조온려[趙溫呂·趙溫其]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4명을 두었다고 하였으나, 묘지명에는 5남 4녀를 두었다고 한다. 열전에 누락된 4남은 천태종 승려이자 묘련사(妙蓮寺)에 활동한 의선(義旋)이다. 의선은 선과(禪科)의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한 후 진구사(珍丘寺)의 주지로 있었다. 그리고 장녀는 충렬왕대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한 노영수(盧潁秀)에게, 2녀는 원나라의 강절평장사(江浙平章事) 오마르[吳抹·烏馬兒]에게, 3녀는 남포 백씨(藍浦白氏) 백문절(白文節)의 아들인 백효주(白孝珠)에게, 4녀는 서원 염씨(瑞原廉氏) 염승익의 아들인 염세충(廉世忠)에게 각각 시집갔다.김용선 편, 「조인규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 趙仁規, 字去塵, 平壤府祥原郡人, 母夢日入懷, 因有身. 生而穎悟, 稍長就學, 略通文義. 國家選子弟通敏者, 習蒙古語, 仁規與是選. 以未能出儕輩, 閉戶三年, 晝夜不懈, 遂知名, 得補諸校, 累遷將軍.忠烈時, 仁規使麾下卒介三, 誘南京民八人爲獺戶, 民之逃賦者, 多附之, 歲納獺皮于敬成宮, 半入仁規家. 南京司錄 李益邦囚介三, 仁規訴公主曰, “南京吏裂擲宮敎.” 公主怒, 逮繫益邦及副使崔資壽, 遣將軍 林庇鞫之. 庇具得其實, 以復公主, 還民元籍, 流二人, 尋釋之.有宰相奏鷹坊之害, 王怒, 欲請回回之見信於帝者, 分掌鷹坊, 令宰相不復言, 仁規力諫而止. 拜右承旨, 王上書中書省曰, “陪臣趙仁規, 曉蒙漢語, 譯朝廷詔勑文字, 無有違誤. 予昔侍天庭, 終始隨從, 又事公主, 恪勤朝夕. 請賜牌面, 充王京脫脫禾孫兼推考官頭目.” 元以爲宣武將軍·王京斷事官·脫脫禾孫, 賜金牌. 王敎曰, “仁規當東征時, 能以國家事, 奏達宸所. 天子授寡人中書左丞相, 又賜群臣都元帥·萬戶·千戶金銀牌, 皆其功也. 宜別錄功, 賜田民, 子孫超等錄用.” 王嘗御南門, 中贊 金方慶醉騎而過, 仁規素與方慶, 權勢相逼, 至是, 乘機讒之, 乃囚方慶于巡馬所. 歷知密直司事·僉議贊成事. 都評議錄事 金溫妻, 夜竊娣家財被執, 娣夫與仁規爲姻婭, 仁規縛溫妻杖之, 人皆非之. 王欲拜中贊, 仁規曰, “君恩雖至重, 洪子藩以德望爲冢宰旣久, 臣遽處其上, 如衆議何?” 固辭乃止. 未幾拜中贊, 尋爲左中贊. 宰樞條上時弊三事, 王怒, 仁規恐禍及己, 密告王曰, “前上三事, 非臣所知, 請鞫之.” 王囚都評議錄事 李紆巡馬所, 命萬戶 高宗秀, 訊倡議者. 宗秀痛加栲掠, 紆誣以李混對, 混坐此罷. ○ 二十四年, 加司徒·侍中·叅知光政院事. 初仁規女爲忠宣王妃, 至是, 有人貼匿名書于宮門云, ‘趙仁規妻, 敎巫呪咀, 使王不愛公主, 而鍾愛己女.’ 公主下仁規及其妻于獄, 元遣使鞫仁規, 又鞫仁規妻極慘酷, 妻誣服. 遂執仁規及女壻崔冲紹·朴瑄以歸, 皆籍其家, 輸使臣館. 元杖流仁規于安西, 冲紹于鞏昌, 後放還仁規, 王以帝命, 卽除判都僉議司事. 忠宣在元, 以仁規爲咨議都僉議司事·平壤君, 開府置官屬, 賜宣忠翊戴輔祚功臣號. 遣承旨 金之兼來啓曰, “趙仁規年高德邵, 爲國元老, 許朝會玉帶傾盖侍從, 贊拜不名, 劒履上殿. 國有大事, 僉議密直一人, 就家咨禀, 若有不聽仁規及中贊 崔有渰約束者, 以違法論.” 王從之. 三十四年卒, 年七十二, ​謚貞肅. 仁規, 美風儀, 寡言笑, 涉獵傳記. 初國人雖學蒙古語, 未有善敷對者, 我使如京, 必令大寧摠管 康守衡, 引入奏. 仁規嘗獻畵金磁器, 世祖問曰, “畵金欲其固耶?” 對曰, “但施彩耳.” 曰, “其金可復用耶?” 對曰, “磁器易破, 金亦隨毁, 寧可復用?” 世祖善其對, 命 “自今, 磁器毋畵金, 勿進獻.” 又曰, “高麗人解國語如此, 何必使守衡譯之?” 有王人與我國蓄憾, 欲改土風愬帝, 事叵測. 仁規單騎入覲, 敷奏明辨, 事遂寢. 西北二鄙, 復歸于我, 亦仁規專對之功. 王每有奏請, 必遣仁規, 凡奉使者三十, 頗著勤勞. 然起於微賤, 驟秉鈞軸, 爲人外似端莊恬正, 以故得幸, 常出入王臥內, 多聚田民致富. 加以國舅, 權傾一時, 子·壻皆列將相, 人無敢比者. 及遘疾, 子·壻迎醫診視, 仁規曰, “吾發跡行伍, 官至極品, 年踰七旬. 死生有命, 安用醫爲?” 時諸子在元, 唯璉侍疾, 謂曰, “汝家兄弟·姊妹且九人, 愼勿忿爭, 取笑於人. 待汝昆季來, 具訓之, 永爲家法.” 子瑞·璉·珝·瑋.​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고려사열전 조인규[ 趙仁規 ] - Daum 카페고려사 열전 번역문 게시판 권한 안내 회원님은 아직 로그인을 하지 않으셨어요. 먼저 로그인을 하시고 이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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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이 연산(燕山)에 주석(住錫)하면서 나를 볼 때마다 그 일을 언급하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부도의 법을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하늘처럼 끝없는 어버이의 은혜를 어떻게 감히 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더욱 절실하고 그 청이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내가 그 대략적인 내용을 서술하게 되었다.​이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온 오랜 시간 동안 한 번 다스려지면 한 번 혼란스러워지는 등 치세와 난세가 반복되었다. 근래에는 당가(唐家)가 쇠하자 오계(五季 오대(五代))가 번갈아 일어나면서 크게 혼란스러워졌고, 요(遼)와 금(金)이 송(宋)과 더불어 남북으로 분열된 가운데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이 극에 이르렀다. 이에 하늘이 좋은 시운을 열어 주어 성군이 잇따라 일어나고 명신이 계속해서 나오게 한 결과, 천하를 통일하여 뭇사람들의 뜻을 안정시키고 같은 문자와 수레를 쓰게 해서 풍속을 변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면 《주역(周易)》에서 “위대하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여기에서 비로소 나온다.”라고 한 말도 바로 황원(皇元)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겠다.​정숙공(貞肅公)은 태종(太宗) 9년 정유년(1237, 고종 24)에 태어났다. 이때는 변채(汴蔡)를 얼마 전에 거두어들여 천하가 거의 평정되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아직은 남쪽과 서쪽으로 정벌하는 일이 그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본국은 그때 이미 원나라에 귀부(歸附)하였다고는 하나, 권신의 제지를 당하여 강화(江華)에 임시로 도읍했기 때문에, 제때에 입조(入朝)하지 못하는 등 제후의 직분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천병(天兵)이 국경을 압박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또한 국가의 안위가 걸리고 인심의 향배가 결판나는 때인 동시에 속습이 바뀌기 시작하고 삼한이 다시 세워지는 때였다고 할 것이다.​이때를 당하여 중국과 사방의 다른 나라들이 비로소 교통하기 부산고구려$ 시작하였는데, 윗사람의 덕을 선포하고 아랫사람의 정을 전달할 때면 으레 통역관의 도움을 받곤 하였다. 그때에 공이 중국어에 능하고 응대하는 말을 잘하였으므로 발탁되어 높은 관직에 뛰어올랐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관복을 착용하고 입조하여 빈객과 대화를 나누었고, 마침내는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보호하여 사직을 지키는 신하가 되었으니, 공이 이때에 태어나 활약한 것을 살펴보면 어찌 우연이라고만 할 수가 있겠는가.​지원(至元) 기사년(1269, 원종 10)에 충렬왕이 세자의 신분으로 원(元)나라에 입조할 적에 공이 실로 수행하였고, 갑술년(1274)에 황제의 딸을 이강(釐降)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는데, 공이 안에 들어와서 왕을 대할 때에는 국가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두루 진달하였고, 밖에 나가서 왕을 수행할 때에는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빠짐없이 맛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권간(權姦)을 복주(伏誅)하여 명분을 바로잡고, 도읍을 회복하여 나라를 안정시킴으로써, 바다 모퉁이의 창생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생을 즐기며 베개를 편히 하고 눕게 하였으니, 공의 공로가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이에 앞서 원나라 조정에서 사자로 파견한 흑적(黑的)이 유감을 품고 말을 꾸며 분란을 일으키려 하면서 상을 오도한 일이 있었고, 탐라(耽羅)와 평양(平壤) 사람들이 중국의 내군(內郡)에 직속(直屬)되어 거꾸로 자기 주인을 향해 짖어 댄 일이 있었고, 유둔(留屯)한 장수들 중에 해를 끼친 자들이 있었는데, 얼마 후 모두 그만두고 떠나게 한 일이 있었으며, 그 뒤에 유민들과 강제로 끌려가서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에 억류된 백성들을 모두 귀국시킨 일이 있었고, 아첨하는 신하가 일본을 다시 정벌하자는 의논을 제창하고는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해치려 했으나 그 일을 중지시킨 일이 있었으니, 그때마다 공이 분주히 주선하며 전대(專對)한 덕분에 일이 모두 원만하게 해결되곤 하였다.​왕이 공을 보내 상에게 주청할 때마다 상이 안으로 불러서 접견하고는 매우 우악(優渥)하게 위무하였으며, 공이 말하는 것이면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일찍이 공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고려국의 사람이 아니더냐. 그런데도 어쩌면 그토록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자상하고 분명하단 말이냐. 사색(辭色)과 거지(擧止)를 보더라도 전혀 동방의 사람 같지가 않다.”라고 하였다. 아, 국가를 중흥한 공로를 따진다면, 공보다 앞서는 자가 있지 않을 것이다.​공의 휘는 인규(仁規)요, 자는 거진(去塵)이니, 평양군(平壤郡) 사람이다. 고(考) 휘 영(瑩)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에 추증되었고, 비(妣) 이씨(李氏)는 내원승(內園丞) 문간(文幹)의 따님으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에 봉해졌다. 이씨 부인이 품 안으로 태양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얼마 뒤에 잉태하여 마침내 공을 낳았다.​공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르게 영특하였으며, 장난하고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금 장성해서는 글을 읽을 줄 알았는데, 대의를 대략 통하자 곧 그만두고, 무직(武職)을 통해 벼슬길에 진출하였다. 처음에 제교(諸校)를 거쳐서 몇 차례 옮긴 끝에 장군이 되고, 지합문사(知閤門事)가 되고,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좌승선(左承宣)이 되었으며, 그 뒤 네 차례 옮긴 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 부사가 되고, 두 차례 옮긴 끝에 어사대부(御史大夫)와 태자 빈객(太子賓客)이 되었다. 그리고 빈객으로 있다가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승진하였으며, 곧 이어 평장시랑(平章侍郞)의 지위에 올랐다.​경인년(1290, 충렬왕 16)에 상이 가의대부(嘉議大夫)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에 특별히 제수하고, 이어서 금호부(金虎符)를 내려 공의 유능함을 표창하였다. 임진년(1292)에 시중(侍中)이 가해졌다. 대덕(大德) 을사년(1305)에 재차 승진하여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정미년(1307)에 나이를 이유로 퇴직을 청하자, 공신의 칭호를 하사하는 한편, 평양군(平壤君)에 봉하여 군부(君府)를 개설하고 관료를 두게 하였으며, 나라에 대사가 있으면 그 집에 가서 자문을 받고서 결정하도록 하였다.​이듬해에 공이 병에 걸리자 자제들이 명의를 불러들이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성년이 되어 상투를 틀면서부터 나랏일에 종사하였는데, 지금 나이가 이미 칠순(七旬)이 넘었고 관직은 1품에 이르렀다. 그리고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의원이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여러 아들들은 모두 연경(燕京)에 가 있고, 오직 충숙(忠肅)만이 옆에서 모시고 있었다. 그래서 공이 그에게 위촉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시경(詩經)》에서도 ‘형과 아우들이여,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이요, 서로 도모하려 하지 말지어다.〔兄及弟矣 式相好矣 無相猶矣〕’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너희는 동기(同氣)가 많으니, 부디 화를 내며 다투어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라. 너희 형제가 오거든 그때 가서 빠짐없이 가르쳐 주어 가법으로 삼게 하라.”라고 하였다.​그리고는 4월 25일에 병이 위독한데도 불구하고 목욕을 하고 옷을 새로 갈아입은 뒤에 단정히 앉아서 서거(逝去)하였다. 이에 국내의 사서(士庶)들이 달려와서 곡읍하며 말하기를 “공이 평생토록 정직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죽는 것을 보니 생전의 일을 알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왕이 천불은유(天不憖遺)의 탄식을 발하면서, 예법에 맞게 부의(賻儀)하고 장례를 행하게 하였으며, 시호를 내려 정숙(貞肅)이라고 하였다.​공의 부인은 사재경(司宰卿) 조공 온려(趙公溫呂)의 따님으로서,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서(瑞)는 과거에 등제하여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고려 부도원수 삼사사(高麗副都元帥三司使)에 특별히 제수되었으며, 장민(莊敏)의 시호를 받았다. 다음 연(璉)은 관직이 중의대부(中議大夫) 왕부단사관 첨의찬성사(王府斷事官僉議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다음 연수(延壽)는 춘관(春官 예부(禮部))의 과거에 급제하여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관군만호 삼사사(管軍萬戶三司使)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다음 의선(義旋)은 정혜원통 지견무애 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師)의 호를 특별히 하사받고, 천원연성사(天源延聖寺)의 주지(主持)와 본국 영원사(瑩原寺)의 주지를 겸하였으며, 복국우세 정명보조 현오 대선사(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로서 삼중대광(三重大匡)의 품계에 오르고 자은군(慈恩君)에 봉해졌다. 다음 위(瑋)는 지금 중대광(重大匡)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재직중이다. 장녀는 좌승선(左承宣) 노영수(盧穎秀)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강절 평장(江浙平章) 오마아(烏馬兒)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대호군(大護軍) 백효주(白孝珠)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호부 시랑(戶部侍郞) 염세충(廉世忠)에게 출가하였다.​손자 약간 명이 있다. 원수(元帥)의 장남 굉(宏)은 급제하여 관직이 전교 부령(典校副令)에 이르렀고, 다음 천기(千䙫)는 진사에 급제하여 지금 밀직 부사(密直副使)이고, 다음 천유(千裕)는 지금 원윤(元尹)이며, 딸은 안길왕(安吉王) 야아길니(也兒吉尼)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판서(判書) 김경직(金敬直)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연덕대군(延德大君) 진(瑱)에게 출가하였다. 단사관(斷事官)의 장남 사민(斯民)은 지금 낭장(郞將)이고, 다음 덕유(德裕)는 지금 봉훈대부(奉訓大夫) 왕부단사관 판전의시사(王府斷事官判典儀寺事)이고, 다음은 윤선(允瑄)이고, 다음 보해(普解)는 머리를 깎고 천태교(天台敎)의 선발 시험에 뽑혔으며, 딸은 만호(萬戶) 권형(權衡)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우상시(右常侍) 김상린(金上璘)에게 출가하였다. 만호의 장남 충신(忠臣)은 지금 선무장군(宣武將軍) 관군만호 삼사좌윤(管軍萬戶三司左尹)이고, 다음은 신(信)이며, 딸은 낭장 김휘산(金暉山)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상호군(上護軍) 윤지표(尹之彪)에게 출가하였다. 찬성사(贊成事)의 아들 흥문(興門)은 지금 소부윤(少府尹)이다. 외손 약간 명이 있다. 장녀의 아들 탈(頉)은 지금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졌으며, 딸은 판서 허부(許富)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삼사사(三司使) 김상기(金上琦)에게 출가하였다. 삼녀의 아들 충윤(忠胤)은 지금 전리 좌랑(典理佐郞)이며, 딸은 상호군 이권(李權)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별장(別將) 김오만(金五萬)에게 출가하였다. 사녀의 장남 효신(孝臣)은 지금 삼사 좌윤(三司左尹)이고, 다음 불노(佛奴)는 지금 익정사 승(翊正司丞)이며, 딸은 호군(護軍) 민현(閔玹)에게 출가하였다. 증손 이하도 매우 많은데, 모두 기재하지 않는다.​공은 자질이 명민하고 기우(器宇)가 웅위(雄偉)하였으며, 과묵하고 풍채가 아름다웠다.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고 일을 강직하게 처리하면서 4대에 걸쳐 임금을 보필하여 우뚝 국가의 원신(元臣)이 되었다. 공은 성품이 또 선을 좋아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석교(釋敎)를 독실하게 믿어 청계(淸溪)의 불사를 창건하고, 상을 위해 복을 축원하였다. 이와 함께 묘전(妙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황금으로 쓰고 해장(海藏 대장경(大藏經))을 먹으로 찍어내는가 하면 범상(梵像 불상(佛像))을 회화(繪畫)하고 소조(塑造)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그리고 공은 집안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자제를 올바르게 가르쳤다. 그리하여 공이 아직 늙기 이전에 벌써 많은 자손들이 달관(達官)과 명사(名士)가 되어 중외에 퍼졌고, 공이 이미 죽은 뒤에도 모두 가훈을 준수하여 효도하고 우애하며 화목하게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으니, 공평하고 균등하게 대하라는 시구(鳲鳩)의 시나 환난에 급히 달려가야 한다는 척령(鶺鴒)의 시에 비추어 보더라도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보통 사람의 정으로 보면 날이 멀어질수록 더욱 잊히게 마련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공이 세상을 떠난 뒤로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다시 불후(不朽)하게 할 도리를 강구하여 죽은 이를 산 사람처럼 모시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내가 이 기문을 짓게 되었다. 趙貞肅公祠堂記至正改元春。糓在征東幕。贊成事趙公與其姪平原君。持家傳來徵予文曰。先君貞肅公功在社稷。德垂後世。雖銘諸幽堂。而神道未有碑。家乘國史。人鮮得窺。恐久堙沒無聞。且先君甞於舍後作堂。爲燕居之所。因稱祗園。今欲於其中垂先君像。以時致祠。立圭石庭中。具刻功德。俾子若孫習聞佩服。無墜先志。無忘先訓。子其毋辭。予時方任滿還都。未有以應之也。今貞肅公之子三藏法師旋公住錫燕山。每見予。語及其事。且言雖學浮屠法。昊天罔極。恩何敢忘。其言益切而其請益廑。糓廼叙其大槩曰。天下之生久矣。一理一亂。近自唐家旣衰。五季大亂。遼金與宋。南北分裂。戰爭不息。生民之塗炭極矣。天開景運。聖人繼作。名臣輩出。一六合定羣志。同文軌變風俗。易曰。大哉乾元。萬物資始。其惟皇元乎。貞肅公生於太宗九年丁酉歲。時甫收汴蔡。天下幾定。而南征西伐。尙猶未已。本國雖已歸附。而制於權臣。寓都江華。述職不時。以致天兵壓境。此亦國步安危之機。人心向背之際。俗習遷變之始。而三韓之再初也。當是之時。夷夏始通。宣上德達下情。動資舌人。而公以能華言善辭令。拔擢飛騰。始則束帶立朝。與賓客言。終則尊主庇民。爲社稷臣。觀公之生。豈偶然哉。至元己巳。忠烈王以世子入覲。公實從之。甲戌。釐降帝女。令襲王位。其入對冕旒。歷陳利害。出負羈絏。備甞艱險。誅權姦以正名。復都邑以定國。使海隅蒼生。煕煕奠枕。迄至于今。繄公之功居多焉。初。朝廷所遣黑的。畜憾餙詞。欲事紛更。已誤天聽。耽羅,平壤之人。直隸內郡。反吠其主。與夫留屯將率之耗害者。尋皆罷去。其後流民及被掠爲遼瀋所敝者。悉使歸國。曁佞臣倡議再征日本。欲因軍興。蟊賊我邦。事得中止。皆由公汗馬專對之力也。凡王之遣公奏請也。趣召入見。慰撫良渥。所言未甞不允。世祖甞謂曰。汝非國人耶。何其敷對詳明。辭色擧止絶不類東人也。於戱。第其中興之功。無出公之右者矣。公諱仁䂓。字去塵。平壤郡人。考諱瑩。贈金紫光祿大夫樞密院副使。妣李氏。內園丞文幹之女。封土山郡夫人。夫人夢日入懷。已而有身。遂生公。生而穎異。不好嬉戲。稍長。知讀書。略通大意。卽去。從虎職。始由諸校。累遷將軍。知閤門事。御史中丞左承宣。四轉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再遷御史大夫太子賓客。由賓客陞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就陞平章侍郞。庚寅。特授嘉議大夫高麗王府斷事官。仍降金虎符。以旌其能。壬辰。加侍中。大德乙巳。再進判都僉議司事。丁未。引年乞退。錫功臣號。封平壤君。開府置官僚。國有大事。卽其家咨决焉。明年遘疾。子弟迎良醫入。公曰。吾結髮徇國。年踰七旬。官至一品。且死生有命。醫何能爲。時諸子赴都。唯忠肅侍側。囑之曰。欲理其國。先齊其家。詩不云乎。兄及弟矣。式相好矣。無相猶矣。汝家夥同氣。愼毋忿爭爲人所笑。待汝兄弟來。其具訓之以爲家法。四月二十五日。疾革。沐浴更衣。端坐而逝。國中士庶奔走哭泣曰。聞公平生正直。見其死。卽知其生矣。訃聞。王發天不憖遺之嘆。賻葬以禮。謚曰貞肅。妣夫人。司宰卿趙公溫呂之女。生五男四女。長男瑞。登科第。特授懷遠大將軍高麗副都元帥三司使。謚莊敏。次璉。官至中議大夫王府斷事官僉議贊成事。謚忠肅。次延壽。擢第春官。特授昭勇大將軍管軍萬戶三司使。次義旋。特賜定慧圓通知見無礙三藏法師住天源延聖寺兼住本國瑩原寺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三重大匡慈恩君。次瑋。今爲重大匡僉議贊成事。長女適左承宣盧穎秀。次適江浙平章烏馬兒。次適大護軍白孝珠。次適戶部侍郞廉世忠。孫若干。元帥長男宏。及第。官至典校副令。次千䙫。第進士。今爲密直副使。次千裕。今爲元尹。女適安吉王也兒吉尼。次適判書金敬直。次適延德大君瑱。斷事官長男斯民。今爲郞將。次德裕。今爲奉訓大夫王府斷事官判典儀寺事。次允瑄。次普解。祝髮中天台敎選。女適萬戶權衡。次適右常侍金上璘。萬戶長男忠臣。今爲宣武將軍管軍萬戶三司左尹。次信。女適郞將金暉山。次適上護軍尹之彪。贊成事男興門。今爲少府尹。外孫若干人。長女男頉。今封慶陽君。女適判書許富。次適三司使金上琦。三女男忠㣧。今爲典理佐郞。女適上護軍李權。次適別將金五萬。四女長男孝臣。今爲三司左尹。次佛奴。今爲翊正司丞。女適護軍閔玹。曾孫以下甚衆。皆不載。公資明敏器雄偉。寡言語美風儀。接物寬和。執事剛方。弼亮四世。蔚爲元臣。性又好善喜施。尤篤於釋敎。刱淸溪佛寺。爲上祝釐。金書妙典。墨印海藏。繪塐梵像。不可勝紀。至於持家嚴。敎子以義。逮公未老。子孫多爲達官名士。布列中外。旣沒之後。咸遵家訓。孝友怡怡。人不間言。尸鳩平均。脊令急難。其不愧矣。凡人之情。日遠日忘。公沒殆餘三紀。而又圖所以不朽。而事亡如存者如此。是爲記。​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조 정숙공(趙貞肅公 조인규) 사당의 기문 이곡(李穀) - Daum 카페조 정숙공(趙貞肅公 조인규) 사당의 기문 이곡(李穀) 지정(至正)으로 개원(改元)하던 해의 봄에 내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막부에 있었는데, 찬성사(贊成事) 조공(趙公)이 그의 조카 평원군(平原君)과 함께 가전(家傳)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기문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선군 정숙공은 사직을 위해 공을 세웠고, 후세에 전할 만한 덕도 남겼cafe.daum.net----------------------------------------------------------------------------------------------------------------------------------------------------------------​묘지명(삼국 고려시대)조인규묘지명(趙仁規墓誌銘)​조인규묘지명(趙仁規墓誌銘) 묘지명은 『평양조씨세보(平壤趙氏世譜)』(1929)에 수록되어 있다. 묘지명은 1308년(충렬왕 34)에 방우선(方于宣)이 작성하였다.​조인규(趙仁規, 1237~1308)의 자는 거진(去塵)이며, 평양군(平壤郡) 사람이다. 아버지는 영(瑩)이며, 어머니 이씨(李氏)는 유분(有芬)의 딸로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숙공(貞肅公)이다.​묘지명에 따르면 조인규는 충렬왕·충선왕때의 재상이었다. 몽고어에 능하여 무려 30여 차례나 사신이나 국왕의 수행원으로 원나라에 갔다. 다루가치의 철수 등 주로 고려와 원 사이의 외교현안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조온려(趙溫呂)의 딸과 결혼하여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서(瑞), 차남은 연(璉), 3남은 연수(延壽), 4남은 승려 의선(義旋), 5남은 위(瑋)이다. 장녀는 노영수(盧潁秀)에게, 둘째는 원나라 사람 오말(吳抹)에게, 셋째는 백효주(白孝珠)에게, 넷째는 염세충(廉世忠)에게 각각 시집갔다. 선충익대보조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수태위 판중서문하사 상장군 평양군(宣忠翊戴輔祚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守太尉 判中書門下事 上將軍 平壤君)이며 추증된 시호 정숙공(貞肅公) 묘지명 대저 신하가 된 사람은 네 가지 몸가짐을 가져야 하나니, 몸단속을 잘하여 엄중하게 바른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하나이고, 일에 임해서는 공(公)을 따르고 사(私)를 가볍게 보는 것이 둘이며, 사신으로 나가게 되면 잘 대처하여 나라의 명예를 높이고 넓히는 것이 셋이며, 조정에서 일하게 되면 행동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넷이다. 신하로서 그 한 가지를 가진 이도 또한 드문데, 하물며 한 몸에 네 가지 몸가짐을 구비한 사람은 대개 천 년에 한 사람뿐일 것이니, 우리 평양군(平壤君)이 바로 그 분이다.​공의 이름은 인규(仁規)이고, 자는 거진(去塵)으로, 평양군(平壤郡) 사람이다. 아버지 영(瑩)은 금오위 별장(金吾衛 別將)이었는데, 공이 높이 되었기 때문에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이부상서 상장군(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吏部尙書 上將軍)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내원승(內園丞) 유분(有芬)의 딸인데 여러 차례 봉해져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이 되었다. 어머니가 태양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에 잉태하여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문에 뜻을 둘 나이가 되자 공을 세워 나라를 바로 잡겠다는 큰 뜻을 세워, 문자(文字)를 가볍게 여겨 그것을 버리고 태자부시위(太子府侍衛)가 되었다. 무오년(고종 45, 1258)에 이르러 장군 인규(仁揆) 휘하의 대정(隊正)이 되었다. 나라에서 무반[山西]의 자제 중에 영리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골라 대조(大朝, 元)의 언어를 가르치게 하였는데, 공이 이에 참여하여 선발되었다. 계해년(원종 4, 1263)에 교위(校尉)로 승진하고, 기사년(원종 10, 1269)에 지금의 임금(忠烈王)이 세자로서 원의 조정에 들어갈 때에 공이 수행하여 갔는데,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섭산원(攝散員)이 되었다. 임금을 수행한 4년 동안 보좌한 공로가 많았다.​갑술년(원종 15, 1274)에 임금이 원 황실의 딸을 배필로 삼고 돌아와 왕위를 이어 받으니, 그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으로 뛰어 오르고, 얼마 되지 않아 장군 지합문사 겸 어사중승(將軍 知閤門事 兼 御史中丞)에 임명되었다. 무인년(충렬왕 4, 1278)에 대장군 직문하성(大將軍 直門下省)으로 옮기고, 기묘년(충렬왕 5, 1279)에 우승선(右承宣)에 임명되면서 정의대부 상장군 지병부사 태자우유덕(正議大夫 上將軍 知兵部事 太子右諭德)이 더해졌다가 곧 좌승선 지이부사(左承宣 知吏部事)로 옮겼다. 임오년(충렬왕 8, 1282)에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으로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병부상서(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兵部尙書)로 뛰어 올랐다. 갑신년(충렬왕 10, 1284)에 지원사(知院事)가 더해지고, 병술년(충렬왕 12, 1286)에 어사대부 태자빈객(御史大夫 太子賓客)으로 승진하였다. 정해년(충렬왕 13, 1287)에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로 뛰어 오르고, 이어 문하평장사 태자소사(門下平章事 太子少師)가 더해졌다. 무자년(충렬왕 14, 1288)에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더해지고, 경인년(충렬왕 16, 1290)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와 선수 가의대부 왕부단사관(宣授 嘉義大夫 王府斷事官)이 더해지면서 삼주호부(三珠虎符)를 띠었다. 신묘년(충렬왕 17, 1291)에 판병부사(判兵部事)가, 임진년(충렬왕 18, 1292)에 문하시중 판이부사 태자태사(門下侍中 判吏部事 太子太師)가, 정유년(충렬왕 23, 1297)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수태위 판중서문하사(壁上三韓 三重大匡 守太尉 判中書門下事)가 더해졌는데, 나머지는 모두 그전과 같았다.​무술년(충렬왕 24, 1298)에 간사한 사람이 말을 꾸며서 망녕되게 고소하니, 공은 이 때문에 원의 조정에 가게 되었다. 원의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로 힐문하였으나, 대의를 확고하게 지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말이 없었으므로, 중국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칠팔 년 남짓 억류되어 있다가, 황제(成宗)가 한결같은 절개를 가상하게 여겨 대덕(大德) 9년 을사년(충렬왕 31, 1305)에 조칙을 내려 그전과 같은 임무를 맡으면서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 해 12월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판중서문하사(壁上三韓 三重大匡 判中書門下事)에 다시 임명되고 나머지도 전과 같이 되었다. 정미년(충렬왕 33, 1307)에 자의중서문하사(咨議中書門下事)로 승진하고 평양군(平壤君)으로 봉해지자, 비록 집에 있으면서도 무릇 군국(軍國)에 관한 중요한 일은 모두 나아가 결정하게 되었다.​무신년(충선왕 즉위, 1308)에 부(府)를 설치하고 관원을 두게 하였으며,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을 더하였다. 공은 이에 “평생 동안 사방으로 바쁘게 다니느라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이제는 이미 군(君)으로 봉해지기에 이르고, 나이도 70이 넘었으니, 마땅히 잔치를 베풀면서 즐겁게 지내해야 하겠소” 라고 하고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 은거하며 고결하고 즐겁게 지낸 일을 사모하였다. 또 마음으로는 오로지 부처를 섬겼다. 일찍이 대장경을 펴내려 하여 특히 승려[開士]들을 집으로 불러 모아 책을 만들었는데, 그 해 3월에 시작하여 4월 19일에 와서야 일을 다 마쳤다. 그 날 밤에 집안의 어른과 아랫사람 네 명이 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어떤 신인(神人)이 옷을 갖추어 입고 찾아 와 문을 두드리면서 말하였다. “저승에서 평양군이 불경을 만드는 것을 끝내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맞아 오라고 하기에 왔습니다.” 과연 이튿날이 되자 목 위에 작은 종기가 돋아났다. 용한 의원을 불러 진찰하게 하였으나 “질환이 어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도 또한 “죽고 사는 것은 명(命)에 달려 있는 것이니 회피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하며 드디어 의약(醫藥)을 물리쳤다. 처음에 공은 꿈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존상(尊像)이 하늘에 닿도록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양과 같은 그림 한 폭을 이루고자 하여 병이 위중한데도 몸소 벽에 의지하여 점을 찍고 곧 화공을 불러 초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비록 병중에 있으면서도 쾌활하고 자재(自在)함이 이와 같았다.​이에 앞서 여러 아들이 모두 왕명을 받아 원에 들어가 있고, 오직 둘째 아들 연(璉)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25일이 되자 뒷일을 부탁하여 말하였다. “오랜 전생부터 인연이 있어 같은 형제로 태어났으니, 집안일로 서로 시기하고 미워해서는 안 된다. 무릇 나라를 잘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집안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맏아들 서(瑞) 등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형은 공손하고 동생은 순종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마라.” 말을 마친 뒤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이 되자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향로를 받들며 찬불(讚佛)하고, 옛날의 게(揭)를 외우면서 단정히 앉은 채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이다.​성 안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달려와 우러러 예를 바치면서, “공이 바르고 곧게 공사(公事)를 받든다고 들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그 참 본성을 알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모두 찬탄하면서 울었다. 임금도 부음을 듣고 몹시 슬퍼하여 담당 관리에게 장례일을 도와 주라고 명하였다. 6월 28일에 개성(開城) 웅곡(熊谷) 북쪽 기슭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정숙공(貞肅公)이라고 추증하였다.​공은 사람됨이 풍채가 잘 생기고 말이 적었으며, 단정하고 진실하여 번드레함이 없었다. 비록 무관직에 종사하였으나 사서(四書)와 전기(傳記)에도 자못 관심을 두었고, 또 글씨를 잘 썼다. 평생에 사물을 대하면 관대하고 온화하여 겸손하였으나, 일을 두고서는 꺼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하였으므로 사람들 중 감히 범하는 자가 없었다. 하위직에 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정에 출입한 것이 무릇 30여 차례였는데 거동하기만하면 나라를 바르게 하고 구한 성과가 있었다.​지난 을해년(충렬왕 1, 1275)에 중국 조정에서 보낸 두목(頭目) 흑적(黑的)이 우리 나라와 언짢은 감정을 쌓아 왔는데, 우리의 습속을 고치려고 황제에게 가서 상소하자 일이 이미 이루어져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공은 홀로 말을 달려 황제에게 친히 정상을 아뢰어 윤허를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달로화적(達魯花赤)의 종전군(種田軍)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모두 파하여 철수하게 하였으니, 이 일이야말로 만세에 남을 공적이다. 그리고 또 임금(忠烈王)이 여덟 글자의 공신(功臣)이 되게 하고 행성승상(行省丞相)에 오르게 한 것, 첨의부(僉議府)가 2품의 아문(衙門)이 된 것, 양대(兩臺, 僉議府와 密直司)의 은인(銀印)을 내려 받게 한 것, 그리고 남쪽의 섬과 북쪽의 변방지대가 우리의 강토로 다시 속하게 한 것 등은 모두 공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전후하여 세운 것을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단지 그 중에서 더욱 두드러진 것만을 든 것이다.​조청대부 사재경(朝請大夫 司宰卿)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조온려(趙溫呂)공의 딸과 결혼하여 5남 4녀를 낳았다. ​장남 서(瑞)는 우림(羽林)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 보문각대학사 상장군(銀靑光祿大夫 知樞密院事 寶文閣大學士 上將軍)으로 선수 관고려군 정동좌부도원수(宣授 管高麗軍 征東左副都元帥)가 되었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공의 생전에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서급(犀級)에 이르렀다. 차남 연(璉)은 지금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 병부상서 응양군상장군(金紫光祿大夫 樞密院副使 兵部尙書 鷹揚軍上將軍)으로 선수 왕부단사관(宣授 王府斷事官)이다. 셋째 연수(延壽)는 지금 영렬대부 비서감 한림시강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榮列大夫 秘書監 翰林侍講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이고, 선수 관고려군만호(宣授 管高麗軍萬戶)에 제수되었다. 형제 세 명이 일시에 다같이 삼주호부(三珠虎符)를 띠었으니, 참으로 드문 일이다. ​올 봄에 원수공(元帥公, 瑞)이 중국 조정에 들어가 처음으로 부명(符命)을 받았는데 이에 앞서 시를 지어 부친에게 바쳤다.​한 가문에 세 명씩이나 호부(虎符)를 받으니천만고(千萬古)에 없는 일입니다.누구의 음덕 탓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아버님은 머리가 하얗게 세셨군요.​마침 공이 별세하여 미쳐 눈으로 보지 못하고 다만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으니, 이것이 하나의 한이다. 넷째 의선(義旋)은 천태종(天台宗)에 투신하여 선과(禪科)의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는데 지금 선사(禪師)가 되어 진구사(珍丘寺) 주지로 있다. 다섯째 위(瑋)는 지금 조산대부 신호위보승장군(朝散大夫 神虎衛保勝將軍)이다.​장녀는 영렬대부 추밀원좌부승선 판비서시사 한림시독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榮列大夫 樞密院左副承宣 判秘書寺事 翰林侍讀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인 노영수(盧潁秀)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원(大元)의 영록대부 강절등처 행중서성평장정사(榮祿大夫 江浙等處 行中書省平章政事)인 오말(吳抹)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조의대부 신호위대장군 지각문사(朝議大夫 神虎衛大將軍 知閣門事)인 백효주(白孝珠)에게 시집갔으며, 넷째는 조봉대부 용호군대장군(朝奉大夫 龍虎軍大將軍)인 염세충(廉世忠)에게 시집갔다.​공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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